Casa Batlló

( 카사 바트요 )

카사 바트요(카탈루냐어: Casa Batlló, 스페인어: Casa Batlló)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 중 하나로, 200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이는 앞서 해당 부지에 있었던 Emilio Sala Cortés의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엔산체 지구(에이샴플라 지구)를 가로지르는 대로인 바르셀로나 파세오 데 그라시아 거리 43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이 구역은 다른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작품들이 모여있어 소위 불화의 사과(사방이 도로로 둘러싸인 도시의 한 구획)로 불리기도 한다.

공사는 1904년 ~ 1906년 사이에 진행되었다.카사바트요는 가우디의 완벽한 예술성을 반영한다. 20세기 초반의 자연주의에 속했던 가우디는, 건축물 각각에 필요한 건축 방식을 고안 해 내기 위해 건축 부지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예술가였던 가우디는 이와 더불어 자유로운 창작방식으로 상상력 넘치는 장식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바로크 형식에서 시작한 그의 작품들은 구조적 완전함을 가졌으며, 이는 크기와 모양에서의 제약, 합리주의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그 이전에 존재 하였던 그 어떤 고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형태를 띈다.

원래의 건물은 바르셀로나의 수많은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 Emilio Sala Cortés(1841-1920)에 의해 지어졌으며, Emilio Sala Cortés는 바르셀로나 건축 학교의 교수로, 가우디 스승 중 한 명 이었다.

 
바트요 가족

1903년, 이 건물은 바르셀로나에서 여러 개의 직물 공장을 운영하였던 부유한 사업가였던 조셉 바트요의 소유가 되었다. 바트요는 라 반구아르디아 신문의 편집자였던 고도 백작 가문의 Amàlia Godó i Belaunzarán과 결혼 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5명의 자녀가 있었다. 바트요 부부는 생전 카사바트요 메인 살롱에서 거주 하였으며, 바트요 부부 사후인 1954년, 그들의 자식들이 이를 매입 한 뒤 각자 다른 층에 차례대로 입주하여 최근까지 거주하였다. 바트요는 이 건물을 510,000 페세타에 매입하였는데,  애초에는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의도로 구입하였으나 이후 리모델링 하기로 결정하였다. 바트요 부부가 메인 살롱에서 거주하는 동안 나머지 층은 임대하였는데, 당시 부르주아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 이었다. (또한 그 중 몇 개의 층은 그의 자녀들이 결혼할 때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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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여러 건물들이 모여 네모 반듯한 블록을 이루는 바둑판 모양의 바르셀로나 엔산체 중심에 있으며, 이는 1859년에 승인된 Ildefonso Cerdá계획에 기초한다. 양쪽에 건물을 세우고 가운데를 정원으로 삼으려던 Cerdá의 초안은, 마지막에 가서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엔산체 계획으로 인해, 파세오 데 그라시아는 바르셀로나의 중심 거리가 되었으며 따라서 많은 카탈루냐 지방의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주거지로 이곳을 택하게 된다. 덕분에 이 거리는 빠르게 발전하여, 바르셀로나 최고 건축가들이 모인 각축장이 되었다. 과거 파세오 데 그라시아 거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Gibert약국(1879) 과 Torino 바의 장식 (1902)에 가우디가 참여하였는데, 카사밀라를 짓기 전부터 파세오 데 그라시아 거리에 가우디의 영향이 계속 미쳐왔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트요는 리모델링을 위해 가우디에게 프로젝트를 의뢰하였는데, 당시에 이미 유명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1883-1926), 토레 베예스과르드 (1900-1909), 구엘 공원 (1900-1914), 팔마 데 마요르카 대성당 재건 (1903-1912)- 를 진행하고 있었다. 바트요는 가우디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친구였던 페드로 밀라에게 카사밀라 (또한 라 페드레라 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를 건설하는데 가우디를 추천했다.

 
가우디의 카사바트요 초기 스케치(1904년)

가우디는 카사바트요의 파사드, 메인 살롱, 중정의 채광에 가장 공들였으며 창고와 세탁실 공간을 위해 5층을 증축하였다. 나중에 메인 층의 문들 중 몇개를 교체해야 했는데, 이를 원작과 똑같이 재현해낸 가구 장인, Juan Martínez Gómez에게 위임되었다. 가우디는 건축가로서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공법을 지속적으로 탐구했기 때문에, 구상부터 완성까지 수많은 수정을 거쳤다. 1969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서 발견된, 캔손 종이에 연필로 그린 첫 번째 스케치는 건물에 불규칙한 굴곡 형태의 돔을 씌우려던 첫 번째 계획을 보여주는데, 이는 최종적으로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인 용 형태를 띈 아치형 지붕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그의 동료 건축가 Puig i Cadafalch의 대한 경의를 표하며 카사바트요에 인접한 카사 아마트예르의 계단 모양 지붕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초안에서는 지붕 왼쪽에 위치했던 십자가의 위치를 중앙으로 옮겼다.

건물의 행정적 절차는 복잡했다. 1904년 5월, 바트요는 지하실과 건물의 아래층 개조 내용만 담은 가우디의 계획안을 시청에 제출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이전에 제출한 안이 채 승인되기도 전에 지하실 공사, 메인 홀 리모델링, 증축,  파사드 전체 리모델링의 내용을 담은 또다른 계획안을 제출했다. 시에서 모든 허가가 나기 전에 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1906년 1월 26일 시 감독관은 이러한 불법 시공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이러한 신고와 작업 종료 명령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계속되었으며,1906년 4월 30일 작업이 종료된 이후 바트요는 건물 임대에 대한 허가증을 신청하였다. 1912년까지 시의 중재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1912년 11월 17일 마침내 임대권이 부여 되었다.

카사바트요는 바르셀로나시 건축 예술 콘테스트에 출품되었고, 건축가 Bonaventura Bassegoda i Amigó의 el Colegio Condal 이 입상하였다. 당시의 심사위원들이 근대적인 작품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우디의 건축물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1940년 바트요-고도 부부의 딸들에게 카사바트요가 유산으로 상속되었는데, 그들은 Seguros Iberia에 이를 처분하여 그곳에 무역 회사 사무실이 들어서게 된다.

1984년 파사드에 조명이 설치되었고, 당해 메르세 축제의 개막식이 카사바트요에서 이루어졌다.

1993년, 추파춥스 회사의 소유주인 Bernat가문이 인수하여 대중에게 상업적으로 개방하여 현재는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지가 되었다.

1969년  카사바트요는 스페인 국가 예술-역사 문화재로 등재되었으며, 2005년에는 가우디의 작품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Photographies by:
Bernard Gagnon -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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